이성강 감독의 '천년여우 여우비'는 솔직한 작품이다.
기교 따윈 부리지 않고 할 말만 똑 부러지게 한다. 아니, 실제로 대사 처리부터가 그렇다.
혹자는 주인공들 말하는 게 너무 빠르지 않으냐고 손사래를 칠 테지만,
필자가 보기엔 이게 더 현실적이다. 괜히 심각한 척 온갖 인상 찌푸리며 멋진 척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아니라, 왠지 어수룩하고 동생 같은 등장인물이 더 친근감 있게 느껴지지 않는가.
일본 애니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에겐 혹시나 토종 캐릭터들의 행동거지가 자못 거슬릴 수도 있지만,
현실적인 캐릭터가 더 몰입 감을 가져온다는 건 '여우비'를 통해 분명히 입증되었다. 필자 역시 일본 애니와는 다른 '포근함'과 '정겨움'을 '여우비'라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간만에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마치 TV 실사 드라마를 보고 난 '기분'이었다.
사랑스러운 캐릭터의 표본 '여우비', 이 작품의 승리 요소였다랄까
'둘리'와 '하니'로 대변되는 우리 애니메이션은 충분히 기술력이 있음에도 일본 애니 시장의 틈바구니에서 허우적되어 왔다. '원더키디'라는 불세출의 명작이 등장한 시기가 있었지만, 그것도 그때 잠시뿐.
우리 애니메이션은 긴 동면기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 '원더풀 데이즈'를 비롯하여 수많은 작품이 재기를 꿈꾸었지만,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고 그 이유는 감독의 지나친 욕심 탓도 크지만, 우리 사회가 애니메이션에 여전히 녹록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 분위기를 반전시킨 게 이성강 감독이었다. 물론 그의 성과는 수많은 스태프의 공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마리 이야기'가 시작이었다면 '여우비'는 승부작이었다랄까.
성인 관객의 하나로서 조금 아쉬운 건 극 중 줄거리이지만 이는 나중에라도 충분히 만회할 수 있다. 그리고 연령대를 고려한다면 이해할만한 이야기였고, 어른이 보더라도 전혀 유치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기존의 한국 애니메이션의 병폐였던 이야기가 녹아들지 않는 엇박자 시나리오는 확실히 탈피한 것이다.
2D로 표현된 캐릭터들의 움직임과 3D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는 동화 장면들은 우리도 일본보다 더 잘 만들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을 심어 주었다. 그래서 이성강 감독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인기 배우의 성우 발탁은 작품의 흥행성을 고려했을 때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우비'는 배우들의 '색깔' 있는 독특한 목소리 덕분에 작품 분위기를 살릴 수 있었다. 필자가 보기엔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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